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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바의 수는 정확히 무엇을 말한 걸까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관계는 150명 정도라는 말은 이제 거의 상식처럼 돌아다닌다. 연락처를 정리할 때도, 단톡방을 나갈까 말까 망설일 때도 이 숫자가 불려 나온다. 그런데 이 숫자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애초에 무엇을 재려던 것이었는지까지 함께 전해지는 경우는 드물다. 숫자만 남고 그 숫자를 만든 과정은 떨어져 나간 셈이다.

이 숫자가 나온 자리

이 추정을 내놓은 사람은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다. 1990년대의 작업이다. 그런데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여러 영장류 종, 그러니까 원숭이와 유인원 쪽을 놓고 보니 뇌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과 그 종이 이루는 전형적인 무리의 크기 사이에 상관이 보였다. 신피질 비중이 큰 종일수록 더 큰 무리를 이루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던바는 영장류에서 얻은 이 관계를 사람 쪽으로 외삽했다. 인간의 뇌 수치를 그 관계식에 대입해 본 것이다. 그렇게 나온 값이 약 150이다. 즉 이 숫자는 사람을 관찰해서 하나하나 세어 본 결과가 아니라, 다른 종에서 얻은 곡선을 인간 쪽으로 연장해 계산해 낸 값이다. 사소해 보이는 구분이지만 이후의 논쟁은 전부 여기서 갈린다.

근거로 함께 제시된 것들

계산만으로는 설득이 어려우니 방증이 따라붙었다. 소규모 사회의 집단 규모, 역사 속 군사 단위의 편제 인원, 마을 인구, 그리고 자주 인용되는 크리스마스 카드 발송 명단 같은 것들이다. 이런 수치들이 대체로 150 언저리에 모인다는 관찰이 숫자를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다만 목록의 성격을 한 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부 방증이다. 누군가의 친구 사귀는 능력을 실제로 측정한 자료는 여기에 하나도 없다. 마을에 몇 명이 사는지는 그 마을 사람 한 명이 몇 명을 감당하는지와 다른 질문이고, 부대 편제는 지휘와 보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자료들은 숫자와 어울리기는 하지만 숫자를 검증해 주지는 못한다.

150은 상수가 아니라 넓은 구간의 가운데였다

또 하나 잘 전해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원래의 계산이 내놓은 것은 값 하나가 아니라 상당히 넓은 구간이었다. 150은 그 구간의 대략 가운데쯤에 해당하는 수치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중간값 하나를 대표로 삼은 것인데, 대중적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구간은 사라지고 중간값만 남았다. 그리고 남은 중간값은 어느새 상수처럼 다뤄지기 시작했다.

숫자 하나로 굳어지면 태도가 달라진다. 구간이었다면 이 정도 규모라는 느슨한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 150이라는 값이 되는 순간 초과와 미달이 생긴다. 연락처에 이미 이백 명이 있으니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원래의 계산에는 그런 뜻이 들어 있지 않았다.

2021년의 재분석

2021년, 스톡홀름대학교의 파트리크 린덴포르스가 이끄는 연구진이 현대적인 통계 방법으로 이 추정을 다시 계산했다. 결론은 숫자를 다른 값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데이터에서 얻어지는 신뢰구간이 실용적으로는 쓸 수 없을 만큼 넓다는 것이었다. 데이터와 모순되지 않는 범위가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걸쳐 있었다.

이 정도 폭이면 예측력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어떤 사람이 마흔 명과 지낸다고 해도, 삼백 명과 지낸다고 해도 그 데이터와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숫자로는 개인에 대해 아무것도 판정할 수 없다. 이 재분석은 던바가 부주의했다는 고발이라기보다, 그 시절의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던 불확실성이 지금의 방법으로는 보인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더 근본적인 문제: 서로 다른 두 개의 양

통계와 별개로, 개념 쪽에서 나오는 반론이 하나 더 있다. 인간 쪽 자료로 쓰인 수치들은 대부분 집단의 평균 규모다. 마을이 평균 몇 명인지, 부대가 몇 명 단위로 묶이는지, 공동체가 어느 크기에서 갈라지는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 숫자를 읽을 때는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관계의 최대치로 읽는다.

이 둘은 다른 양이다. 어떤 집단이 평균 150명 규모로 유지된다는 사실에서 그 안의 한 사람이 150명을 감당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집단의 크기는 구성원들이 서로 겹쳐 아는 방식, 그 사회의 제도, 땅과 먹을 것 같은 조건에서도 나온다. 집단 평균에서 개인의 능력치로 건너뛰는 도약은 데이터 안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 그 도약은 통속적인 해석 단계에서 일어났다.

5, 15, 50, 150이라는 층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이 숫자와 함께 자주 소개되는 것이 5명, 15명, 50명, 150명으로 이어지는 층위다. 아주 가까운 몇 명이 있고 그 바깥에 조금 덜 가까운 층이 있고, 그런 식으로 겹겹이 넓어진다는 그림이다. 직관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널리 퍼졌다.

다만 이 층위들도 같은 계열의 추정에서 나왔고, 따라서 위에서 말한 의심을 똑같이 받는다. 확정된 사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가까운 사람과 덜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감각 자체는 누구나 알지만, 각 층의 정원이 몇 명이라고 말하는 순간 근거가 감당하는 범위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래도 남는 것

그러면 이 이야기는 통째로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남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한한 무언가가 든다는 감각이다. 시간이 들고, 주의가 들고, 상대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도 무언가가 든다. 아이가 몇 살인지, 지난번에 무슨 일로 힘들어했는지, 그 회사를 아직 다니는지. 이런 걸 알고 있으려면 그 사람 쪽으로 향한 주의가 어느 정도는 계속 켜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의는 무한하지 않다. 그래서 일이 몰리는 시기에는 연락이 줄고, 아이가 어릴 때는 세계가 좁아지고, 이직 직후에는 옛 동료들이 흐려진다. 이걸 설명하는 데 정확한 정원은 필요하지 않다. 한계가 있다는 감각만으로 충분하다. 던바의 수를 비유로 쓰면 이 정도의 쓸모가 있고, 법칙으로 쓰면 근거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이 숫자를 가장 해롭게 쓰는 방법은 사람을 층별로 배치한 명단을 만드는 것이다. 안쪽 다섯 명은 누구고 그다음 열다섯 명은 누구고 여기서부터는 정리 대상이고. 이런 분류는 관계의 실제 모습과도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시기마다 안팎을 오가고, 몇 년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다시 가까워지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음이 확 살아나기도 한다. 오차 범위가 수십에서 수백에 걸치는 추정치를 가져다 실제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데 쓰는 것은, 그 숫자가 견딜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