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뒤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진 이유
스물다섯을 넘기고 나면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다. 친구 사귀는 법을 어디다 두고 온 것 같다는 말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딱히 애쓴 기억이 없는데도 친구가 생겼고, 지금은 사람 만날 기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그때 같은 관계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이건 성격이 변했다거나 마음이 닫혔다는 이야기라기보다, 우정이 자라날 때 뒤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던 조건들이 성인이 되면서 하나씩 빠져나간 결과에 가깝다.
학교가 대신 해 주던 일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사람을 붙여 놓는 장치였다. 같은 교실, 같은 시간표, 같은 통학 동선. 누구와 친해지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는데도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매일 몇 시간씩 같은 공간에 있었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아주 서서히 친구가 되어 있었다. 과방이나 동아리방처럼 아무 일 없이도 들어가 앉아 있을 수 있는 방이 있었고, 자취방이 있었고, 시험 기간이라는 공동의 불행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우정은 만들어 낸 것이라기보다 자라난 것에 가깝다. 씨앗을 심은 기억이 없어도 밭 조건이 좋으면 뭔가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다. 어른이 된 뒤에는 그 밭이 없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로 밀어야 하고, 의도로 시작한 관계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색함을 안고 간다.
첫 번째 조건: 계획하지 않아도 반복되는 마주침
가까워지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건 대화의 깊이보다 마주침의 횟수인 경우가 많다. 자주 보는 사이에서는 말을 거는 비용이 거의 0에 가깝다. 오늘 할 말이 없으면 안 하면 된다. 내일 또 보니까. 반대로 일 년에 한 번 보는 사이에서는 그 한 번에 안부와 근황과 지난 공백에 대한 해명까지 다 실어야 한다. 같은 사람인데 만남의 밀도가 달라지면 나눌 수 있는 말의 종류가 달라진다.
어른에게도 반복은 있다. 회사에서 매일 같은 사람을 본다. 다만 그 반복에는 평가와 이해관계와 인사이동이 섞여 있어서, 마주침이 곧 편안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동네 헬스장이나 늘 가는 카페처럼 이해관계 없는 반복도 있지만 이번엔 말을 걸 명분이 없다. 반복은 있는데 대화가 없고, 대화는 있는데 반복이 없는 상태. 성인의 하루는 대체로 이 둘 중 하나다.
두 번째 조건: 목적 없이 남는 시간
학창 시절의 우정은 대체로 자투리 시간에 만들어졌다. 공강 시간, 야자 끝나고 편의점 앞, 별 이유 없이 한 정거장 더 걸어간 밤길. 그 시간에는 처리해야 할 안건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했고, 아무 말 속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들어 있었다.
어른의 만남은 대체로 두 시간짜리 저녁 약속으로 압축된다. 몇 주 전에 날짜를 맞추고, 만나서 근황을 요약해서 보고하고, 서로의 요약이 끝나면 대화가 묘하게 소진된다. 우정에서 실제로 중요한 이야기는 할 말이 다 떨어진 다음에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압축된 만남에는 그 다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무슨 대단한 속내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함께 견뎌 본 적이 있는지의 문제다.
세 번째 조건: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는 자리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은 대체로 조금씩 번갈아 가며 자기를 내보이는 모양을 띤다. 한쪽이 조금 열면 다른 쪽이 조금 열고, 그게 몇 번 오가면 사이가 달라진다. 문제는 성인이 놓인 자리들 대부분에서 자기를 여는 일이 실제로 위험하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요즘 좀 무너져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정보로 처리될 수 있다. 그래서 근황은 자연스럽게 편집된다. 이직했다, 이사했다, 애가 몇 살이다. 사실만 남고 사람이 빠진 요약본이 오간다.
프로필 사진과 SNS도 같은 방향으로 작동한다. 서로의 편집본을 계속 보고 있으면 정보는 늘어나는데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이런가 하는 감각이 생기기 쉽다. 실은 상대도 편집본을 올리고 있을 뿐인데, 편집본끼리는 아무리 오래 마주 봐도 서로를 알게 되지 않는다.
그래도 생기기는 한다, 다만 느리게
어른이 된 뒤에 생긴 친구들의 사연을 들어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다음이 예정되어 있는 구조 안에서 만났다는 점이다. 격주로 모이는 독서 모임, 매주 나가는 운동, 아이 어린이집에서 같은 시간에 마주치는 부모, 몇 달짜리 프로젝트. 한 번의 좋은 대화가 우정을 만든 게 아니라, 좋은 대화를 여러 번 할 수 있게 해 준 반복이 만든 것이다.
대신 속도는 확실히 느리다. 학창 시절에 몇 주면 되던 일이 지금은 일 년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다. 이걸 실패로 읽는 사람이 많은데, 조건이 달라졌으니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는 게 자연스럽다. 세 번쯤 만나고 아직 친하지 않다고 해서 안 될 사이인 것도 아니다.
새로 사귀는 것 말고 다른 길
어른의 친구 사귀기 이야기는 대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실제로 여지가 더 많은 쪽은 이미 아는 사람들이다. 학교 때 알고 지냈지만 깊어지지 않았던 사람, 회사에서 나쁘지 않게 지내다 부서가 갈린 사람, 동아리에서 한두 학기 겹쳤던 선배. 연락처에는 남아 있는데 대화창은 몇 년째 멈춰 있는 이름들이 대개 여기에 해당한다.
이쪽이 유리한 건 앞의 세 조건 중 하나가 이미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반복해서 마주친 시간이 있고, 그때의 서로를 조금은 안다. 처음 만난 사람과는 몇 년에 걸쳐 쌓아야 하는 것이 여기서는 이미 깔려 있다. 남은 건 다음이 예정된 자리를 하나 만드는 정도인데, 그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힘이 든다.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조건의 문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졌다는 감각을 자기 성격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많다. 내가 재미가 없어졌나, 예전보다 폐쇄적이 되었나. 그런데 위의 세 조건은 개인의 태도와 거의 무관하게, 취업하고 이사하고 결혼하고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사라진다. 같은 사람이 조건이 갖춰진 환경에 다시 놓이면 대개 다시 친구가 생긴다.
덧붙이자면 인맥 관리라는 말이 이 대목에서 유독 안 어울린다. 관리라는 말에는 대상을 손실 없이 유지한다는 뉘앙스가 있는데, 우정에서 실제로 필요한 건 유지가 아니라 조건이다. 반복해서 마주칠 자리가 있는지, 목적 없이 흘려보낼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잘 못 지내고 있다고 말해도 안전한 사람이 있는지. 이 중 하나라도 조금 되돌릴 수 있다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알아서 굴러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