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가 되면 친구가 멀어지는 이유
서른 언저리를 지나면 어느 날 문득 계산을 하게 된다.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재작년 겨울이었나, 아니면 그 전이었나. 싸운 적도 없고 크게 서운했던 일도 없는데 사이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다. 이십대에는 이런 계산을 할 일이 없었다. 관계가 저절로 이어졌으니 세어 볼 이유가 없었다. 삼십대에 우정이 멀어지는 건 마음이 식어서라기보다, 하루가 만들어지는 방식이 통째로 바뀌면서 관계가 얹혀 있던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인 경우가 훨씬 많다.
기본값이 뒤집힌다
이십대의 기본값은 만나는 쪽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났고, 못 만나는 날에 오히려 이유가 필요했다. 시험 기간이라, 알바가 있어서, 본가에 내려가서. 삼십대가 되면 이 기본값이 정확히 뒤집힌다. 안 만나는 게 기본이고, 만나려면 이유와 날짜와 서로의 일정 조율이 필요하다. 같은 관계인데 유지 비용을 대는 주체가 환경에서 사람으로 넘어온 셈이다.
이 전환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 들어간 해에 한두 명이 빠지고, 이듬해에 누가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그다음 해에 누가 결혼을 한다. 한 해에 한 칸씩 멀어지다 보면 삼사 년 뒤에 지형이 달라져 있다. 그래서 원인이 되는 사건을 하나도 특정할 수 없고, 특정할 수 없으니 결국 자기 탓으로 돌리게 된다.
비용이 붙었다는 말을 나쁘게만 읽을 필요는 없다. 값이 붙은 건 관계의 가치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공짜로 제공되던 인프라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인프라를 잃은 것과 마음을 잃은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인데, 겪는 사람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이 멀어졌다는 감각으로 도착한다.
같은 나이인데 전혀 다른 하루를 산다
스물다섯의 친구들은 대체로 비슷한 하루를 살았다. 서른다섯이 되면 분산이 최대치가 된다. 한 명은 신생아 때문에 밤에 두 번 깨고, 한 명은 이직 석 달 차라 주말에도 노트북을 열고, 한 명은 논문 학기고, 한 명은 부모님 모시고 병원을 다닌다. 시간대가 안 맞는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겹치는 세계가 줄어든다.
그러면 안부를 묻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육아 중인 친구에게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묻기가 애매하고, 아이가 없는 친구 앞에서 아이 얘기를 길게 늘어놓기도 미안하다. 서로 배려하다 보면 남는 화제가 옛날 이야기뿐인데, 옛날 이야기는 두세 번 반복하면 금방 바닥이 난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 허전한 이유가 대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우리는 이제 안 맞는 사이가 됐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실제로는 안 맞아진 게 아니라 겹치는 표면이 한동안 좁아진 것에 가깝다. 표면은 다시 넓어지기도 한다. 아이가 자라고, 이직이 자리를 잡고, 논문이 끝나면 사라졌던 화제가 돌아온다. 그 몇 년을 못 견디고 관계를 정리해 버리면 돌아올 자리가 없어질 뿐이다.
연락에 용건이 붙기 시작한다
이십대의 연락에는 내용이 필요 없었다. 뭐 하냐, 이거 봤냐, 배고프다. 삼십대의 연락에는 어느새 용건이 따라붙는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그 공백을 설명할 만한 소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진다. 이직을 했다거나 이사를 했다거나, 최소한 결혼 소식쯤은 되어야 연락할 자격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서 이상한 역설이 생긴다. 오래 연락을 안 할수록 연락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첫 문장이 짊어져야 할 무게가 커지고, 무거워진 첫 문장은 다시 뒤로 밀린다. 그리고 이 계산은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저쪽에서도 똑같이 미안해하면서 똑같이 미루고 있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실제로 오랜만에 연락을 받은 사람의 반응은 대체로 반가움이다. 왜 이제야 연락했냐고 따지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 심판대는 연락을 망설이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우선순위 싸움에서 우정은 늘 진다
삼십대의 시간표에는 절대 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출근, 마감, 아이 등원, 부모님 진료 예약. 이것들은 미루는 순간 즉시 대가가 돌아온다. 친구와의 약속은 한 번 미룬다고 그 주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가장 먼저 양보되는 항목이 된다.
문제는 대가가 없다는 게 아니라, 대가가 아주 늦게 한꺼번에 온다는 데 있다. 몇 년쯤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연락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걸 알게 되는 방식으로 온다. 그때가 되면 원인이 된 개별 결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그날의 판단은 전부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얘기가 그러니 매번 나가라는 말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그건 현실적이지도 않다. 다만 시선을 조금 옮겨 볼 수는 있다. 우정이 늘 밀리는 건 그 관계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마감이 없기 때문이다. 마감이 없는 일이 뒤로 밀리는 건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간표라는 물건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멀어짐과 끝남은 서로 다른 상태다
삼십대의 우정을 만난 횟수로 재면 거의 전부가 실패로 보인다. 다르게 재는 방법도 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원래 말투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어떤 사이는 이 년 만에 봐도 삼십 분이면 예전 톤이 돌아오고, 어떤 사이는 세 시간 내내 근황 보고만 주고받다가 끝난다. 이 차이는 만난 횟수와 별로 상관이 없다.
청첩장을 돌릴 때, 혹은 부고를 알려야 할 때 사람들은 자기 관계의 실제 지형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명단을 만들다 보면 몇 년 연락하지 않은 사람 중에 여전히 꼭 알려야 할 이름이 있고, 자주 보던 사람 중에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이름도 있다. 빈도와 거리는 같은 물건이 아니다.
물론 정말로 끝난 관계도 있다. 다만 그 판단을 침묵의 길이만으로 내리는 건 성급하다. 조용해진 관계와 끝난 관계는 밖에서 보면 똑같이 생겼고, 구분은 다시 말을 걸어 보기 전에는 잘 되지 않는다.
줄어드는 게 아니라 모양이 달라진다
삼십대에 관계가 정리되는 걸 손실로만 보는 시선이 흔하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더 가까운 건, 넓게 퍼져 있던 관계가 몇 갈래로 굵어지는 쪽이다. 자주 못 보는 대신 오래 알아온 사람들이 남고,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처음부터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귀해지는 조건이다.
여기서 굳이 뭔가를 한다면, 큰 재정비보다 작은 쪽이 오래간다. 이런 것들이 대체로 부담 없이 이어진다.
- 단톡방에 올릴 소식을 한 사람에게 따로 한 번 더 보내기
- 만나자는 말 대신 그 사람이 예전에 하던 일을 물어보기
- 지나가다 그 사람 생각이 났을 때 그 사실만 짧게 전하기
- 일 년에 한 번쯤은 시간을 크게 비워 두고 멀리 사는 친구를 보러 가기
삼십대의 관계는 이십대처럼 굴러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쪽이다. 자주 못 보는 게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이 시기의 기본 조건이라면, 지금 남아 있는 몇 사람과의 사이도 실패한 상태가 아니라 그냥 조용한 상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