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
결혼식장 입구에서, 장례식장 복도에서,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언제 밥 한번 먹자, 조만간 보자, 연락할게.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상대가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어떨 때는 그 말을 한 자신이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문장이 지켜지지 않는 데는 성의보다 훨씬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인사말이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문장은 모양만 보면 제안이다. 그런데 실제로 하는 일은 인사에 가깝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관계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표시하는 말이다. 반가웠다는 뜻이고, 당신이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서 이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 모두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만나지 않아도 아무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바로 달력을 꺼내 날짜를 정하자고 하면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다. 인사말로 던진 공을 상대가 진짜 공으로 받아 버린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어색함이야말로 그 문장의 정체를 잘 보여 준다.
그러니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해 서로를 탓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그건 지키기로 한 문장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다. 진짜로 만나고 싶었던 경우에도 똑같은 문장을 쓴다는 것이다.
한번, 조만간, 언제
한국어에서 이런 말들은 시점을 무기한으로 미루는 기능을 한다. 조만간이라는 말에는 끝이 없다. 언제 한번은 다음 주일 수도 있고 삼 년 뒤일 수도 있다. 이런 부사가 들어 있는 문장은 달력에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옮겨 적을 수 없는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사라진다.
그런데 이 모호함은 실수가 아니라 설계에 가깝다. 시점을 흐리게 두면 아무도 거절당하지 않는다. 다음 주 화요일 어떠냐고 물으면 안 된다는 답을 받을 수 있지만, 언제 한번 보자는 말에는 거절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관계의 온기를 표현하면서 위험은 전혀 지지 않는, 꽤 잘 만들어진 도구다.
문제는 이 도구가 너무 편해서 진심일 때도 계속 쓰게 된다는 점이다. 정말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조만간 보자고 말하고, 그러면 그 관계도 똑같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구체화하는 쪽이 위험을 진다
날짜를 꺼내는 순간 상황이 달라진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어때, 라고 말한 사람은 그때부터 답을 기다리는 자리에 선다. 안 된다는 답이 올 수도 있고, 답이 늦을 수도 있고, 그 늦음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게 된다. 모호하게 두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이다.
그래서 두 사람 다 구체화를 피한다. 둘 다 만나고 싶어 하는데도 아무도 첫 수를 두지 않는 상태가 만들어진다. 서로 상대가 먼저 연락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각자는 상대가 별로 안 내키나 보다고 해석한다. 실제로는 둘 다 같은 이유로 멈춰 있는데도 그렇다.
이 대목에서 알아 둘 만한 게 하나 있다. 날짜를 먼저 꺼낸 사람이 아쉬운 쪽으로 보인다는 감각은 대체로 본인 머릿속에만 있다. 받는 쪽에서는 그냥 반가운 연락이다. 오랜만에 날짜를 제안받고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보다, 그런 연락이 와서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진짜 약속이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인사말이 실제 만남으로 바뀌는 데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날짜다. 정확한 날이 아니어도 되지만 범위는 있어야 한다. 다음 달 중에, 정도로는 부족하고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정도면 충분하다.
두 번째는 누가 다음에 움직이는가다. 이게 빠지면 대화가 좋게 끝났는데도 무산된다. 서로 상대가 연락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내가 다음 주에 다시 연락할게, 라는 한마디가 들어가면 공이 어디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세 번째는 규모다. 무엇을 할지가 정해지지 않은 만남은 자동으로 저녁 자리가 되고, 저녁 자리는 세 시간짜리 일정이 되고, 세 시간짜리 일정은 서로의 달력에서 자리를 찾기 어렵다. 커피 한 잔인지 점심인지 저녁인지가 정해지면 잡히는 확률이 눈에 띄게 올라간다.
어색하지 않게 구체화하는 문장
모호한 인사말을 실제 약속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건 대단한 말이 아니다. 아래 정도면 대체로 충분히 자연스럽다.
- 말 나온 김에 정하자.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중에 어느 쪽이 나아?
- 이번 달 안에 한 번 보자. 내가 다음 주에 날짜 몇 개 보낼게.
- 저녁은 서로 부담이니까 점심때 한 시간만 볼까?
- 네가 사는 동네로 갈게. 언제가 편한지만 알려 줘.
여기서 효과가 큰 건 두 개의 날짜를 함께 내미는 방식이다. 하나만 제시하면 상대는 되냐 안 되냐를 답해야 하고, 안 될 때는 거절하는 기분이 든다. 둘 중에 고르라고 하면 답이 훨씬 가벼워진다. 그리고 규모를 미리 낮춰 두면 상대도 부담 없이 응하게 된다.
그래도 인사말에는 인사말의 쓸모가 있다
이 문장을 다 없애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 전부와 실제로 날짜를 잡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언제 한번 보자는 말은 관계가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표시로 나름의 역할을 한다. 그 표시가 몇 년쯤 쌓여 있으면, 나중에 진짜 연락할 일이 생겼을 때 말을 걸 근거가 된다.
다만 구분은 해 둘 만하다. 이번 것이 인사였는지 진심이었는지. 진심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한 문장만 더 붙이면 된다. 그 한 문장이 없으면 아무리 진심이어도 결과는 인사말과 똑같아진다.
몇 년 동안 못 만난 사람들의 목록을 보면 대체로 사이가 나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서로 반가워했고, 헤어지면서 조만간 보자고 말했고, 그다음에 아무도 날짜를 꺼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목록이 길다는 건 무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한 문장이 원래 잘 안 나오는 문장이라는 뜻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