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건넬 수 있는 말
부고 문자가 뜨면 대부분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답장 창을 열어 놓고 몇 글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뭐라도 잘못 말할까 봐 창을 닫는다. 그러고 나면 이번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이 글은 그 멈춘 자리에서 무엇을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쓰는 편이 나은지를 정리한 것이다.
말이 안 나오는 건 정상이다
말을 못 고르는 이유는 대개 무심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다. 이 정도의 일에 어울리는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이 멈춘다. 그런데 부모를 잃은 사람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말은 대체로 대단하지 않다. 짧고, 평범하고, 상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말이다.
상을 당한 사람은 사흘 동안 수백 통의 문자를 받는다. 그 상태에서 긴 문장은 읽히지 않는다. 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문장은 부담이 된다. 그러니 좋은 조문 문자의 기준은 감동적인지가 아니라, 읽는 데 3초가 걸리고 답하지 않아도 되는지 쪽에 가깝다.
부고를 받은 직후에 보낼 수 있는 말
가장 무난하고 실제로 많이 쓰이는 형태는 이런 것들이다. 그대로 옮겨 써도 어색하지 않다.
-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곧 갈게.
- 소식 들었어.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 말만 남겨 둬. 내일 빈소에 갈게.
- 지금 정신없을 테니까 답 안 해도 돼. 그냥 알고 있다는 것만 알려 주려고.
- 어머님 소식 들었어. 마음 아프다. 필요한 거 생기면 시간 상관없이 연락해.
공통점이 보인다. 짧고, 답을 요구하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부분이 구체적이다. 반대로 잘 쓰지 않는 편이 나은 문장도 있다. 고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단정하거나, 어디로 가셨을 거라고 말하거나, 이제 편해지셨을 거라는 식으로 죽음의 의미를 대신 정해 주는 말이다. 집안마다 장례의 형식도 믿는 바도 다르고, 그건 밖에서 짐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호상이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오래 아프셨든 연세가 높으셨든, 부모를 잃은 사람에게 그 죽음이 다행인 죽음일 수는 없다. 이 말은 대개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듣는 쪽에서는 슬퍼할 자격을 깎는 말로 들리기 쉽다.
빈소에서는 말이 거의 필요 없다
조문에서 오가는 말은 원래 몇 마디로 정해져 있다시피 하다. 절이나 묵념을 하고, 상주와 맞절을 하고, 얼마 안 되는 인사를 건네고 물러난다. 이 형식은 답답해 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친절한 장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예의를 갖출 수 있게 되어 있다.
상주 앞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이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는 말이든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오히려 이때 대화를 길게 이어 가려는 시도가 상대를 힘들게 한다. 상주는 사흘 내내 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묻는 질문에 몇십 번째 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말 대신 남는 것은 다른 쪽이다. 늦은 시간에 왔다는 것, 먼 데서 왔다는 것, 밥을 먹고 한참 앉아 있다 갔다는 것. 며칠 지나고 나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누가 왔었는지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다. 사정상 갈 수 없다면 그 사실을 짧게 알리는 편이 낫다. 아무 말 없이 안 가는 것과,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한 줄 남기는 것은 나중에 아주 다르게 기억된다.
진짜 어려운 시기는 발인 다음에 온다
장례 기간에는 사람이 넘친다. 결정할 일이 계속 생기고, 몸이 바쁘고, 울 시간도 마땅치 않다. 그러다 발인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면 갑자기 조용해진다. 삼오제나 사십구재처럼 이어지는 절차가 있는 집이라면 그 간격 사이사이가, 그런 절차가 없는 집이라면 그다음 주부터가 그렇다. 주변에서는 이제 좀 정리되었겠거니 생각하고 연락을 줄이는데, 정작 당사자에게는 그때부터 실감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조문보다 더 귀한 연락이 이 시기의 연락이다.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도 않다. 지난주에 못 물어봤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밥은 먹고 있는지 정도면 된다. 상 치르느라 고생했다는 말보다 지금 어떠냐는 말이 낫다. 앞의 말은 끝난 일로 취급하는 말이고, 뒤의 말은 아직 진행 중임을 인정하는 말이다.
한 달 뒤, 석 달 뒤에 오는 연락도 마찬가지다. 이때쯤이면 다들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다가온다. 명절, 생신, 어버이날, 첫 기일처럼 빈자리가 유독 커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 짧게 한 줄 보내는 사람은 대개 오래 기억된다.
피하는 편이 나은 말들
힘내라는 말은 나쁜 뜻이 아닌데도 자주 어긋난다. 지금 힘이 없는 상태인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하면 못 하고 있다는 느낌만 남는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비슷하다.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지금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의 고통이 별것 아니라는 뜻으로 들린다.
나도 아버지 여의어 봐서 안다는 말은 다루기가 특히 까다롭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의 말이 큰 위로가 되는 순간도 분명히 있지만, 그건 상대가 물었을 때다. 묻지 않았는데 내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의 중심이 옮겨 간다. 지금 슬퍼하고 있는 사람은 남의 상실을 들어 줄 여력이 없다.
연락하라는 말도 그 자체로는 따뜻하지만, 실제로는 공을 상대에게 넘기는 문장이다. 상을 당한 사람이 먼저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말보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잠깐 들를까 하고 묻는 편이 훨씬 실질적이다.
잘못 말할까 봐 두렵다면
이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택이 가장 흔하다. 그런데 상을 겪은 사람들이 나중에 서운했다고 꼽는 것은 대개 누가 어색한 말을 했다는 쪽이 아니라, 아무 말도 없었다는 쪽이다. 어색한 문장은 며칠이면 잊히고, 침묵은 남는다.
그러니 문장을 완벽하게 고르려 애쓰기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적는 편이 낫다. 그건 서툰 표현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표현이고, 받는 사람도 대개 그렇게 읽는다.